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누일 1세 (문단 편집) === 십자군의 도래 === 마누일 1세의 치세에서 첫 번째 시험은 1144년에 찾아왔다. [[안티오키아 공국]]의 군주 레몽이 킬리키아의 이양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해 말, 이웃의 [[에데사 백국]]은 이마드 앗딘 장기 1세 아래 다시 일어난 [[지하드]]의 물결에 휩싸여 있었다. 안티오키아의 동쪽 역시 이 새로운 위협에 위험하게 노출되어 있었고, 레몽은 머나먼 서방으로부터 원조를 받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선택지가 없던 레몽은 자존심을 굽히고 동로마 제국에 보호를 요청하기 위해 여정을 떠났다. 황제에게 굴복한 레몽의 충성심은 보장되었으며, 그가 요청하면 지원을 해 줄 것을 약속받았다. 한편 룸 술탄국의 튀르크인들은 서부 아나톨리아와 [[킬리키아]]에 있는 제국의 국경을 계속해서 침탈하고 있었다. 특히, 아나톨리아 서부 지방인 리디아(Lydia)와 프리기아(Phrygia)에 자리잡은 유목민들이 서진하여 제국의 주요한 요지인 트라키시온 테마까지 진출하려는 낌새를 보이자 황제는 대책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이에 1146년, 마누일은 룸 술탄국을 향해 친정했다. 야전에서 세번에 걸쳐 룸군을 격파한 동로마군은 기세좋게 [[이코니온]]에 이르렀다. 아버지 [[요안니스 2세]]가 가꿔놓은 중앙군의 공성 능력은 지중해 세계 최고를 자랑했으나, 외벽의 상당 부분을 파괴했음에도 도시를 최종적으로 점령할 수는 없었다. 이 원정을 시작하기 위한 마누일의 동기 중에는 십자군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옹호해 서방에 보여주기 위한 소망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킨나모스는 이것을 마누일이 새 신부에게 전쟁 기량을 과시하기 위한 욕구로 보았다. 포위가 막바지에 이를 무렵, 마누일은 [[프랑스 왕국]]의 [[루이 7세]]에게 서신을 받았다. 루이가 보낸 편지의 내용은 [[십자군 국가]]의 구제를 위한 군대를 주도하겠다는 의도를 알리는 것이었다. 반백년 전 [[제1차 십자군 원정]]을 겪은 제국은 십자군의 동기가 어떻든 간에 대규모의 십자군이 얼마나 제국에 위협적인지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유럽이 [[기독교]] 일파였다지만 [[가톨릭]], [[정교회]] 등 여러 분파가 있듯이 엄연히 교황을 중심으로 한 서방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중심으로 한 동방으로 교파가 나뉘어 반목하는 일이 잦았으며, 기독교 문화권과 이슬람 문화권의 사이에서 [[샌드위치]]처럼 완충 지대 및 수문장 역할을 하던 것이 당대 로마 제국이었다. 오늘날 [[대한민국]]만 봐도 중국과 일본이라는 양대산맥 사이에 끼인 위치로 인해 대통령의 성향에 따라 국민들에게서 친중 정권이니 친일 정권이니 하는 비판이 쏟아져 나오듯이, 당시에도 특히 서방 세계에서는 제국의 태도에 따라 협력하거나 반목하는 것이 갈렸다. 이때 십자군은 교황을 중심으로 한 서방 세력으로, 로마인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이들에게 잘 보여야 했다. 이뿐 아니라 상당수 십자군들이 제대로 교육받지 않고 쌈박질만 할 줄 아는 [[양아치]]들이었다. 민중 십자군과 1차 십자군을 거치며 이 양아치로 가득한 깡패 십자군이 지나다니는 곳마다 자신들의 소속을 방패로 멋대로 약탈과 [[반달리즘]]을 일삼았으니 십자군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로마 제국 입장으로서는 웬 [[홍위병]] 떼거지가 찬란한 자기네 국토를 지나가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 이 때문에 시간이 지나며 로마 제국은 십자군이라면 이골이 나게 된다.][* 이뿐 아니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함께 전쟁에 참여해 군사 활동을 하는 관계가 아닌 이상에야 제아무리 동맹이나 중립 관계라고 해도 남의 나라 군대가 자기 땅을 대놓고 지나가는 것은 매우 예민한 문제로 받아들여져 왔다. 땅을 내어 준 그 제3국 입장에서는 이후에 공격을 받은 나라에서 이 나라에 대고 왜 자기네 적군들에게 길을 빌려줬냐며, 이는 사실상 그들과 협력한 것이니 그쪽도 적국이라고 나올 수 있는 심각한 외교 문제의 빌미를 떠안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길 좀 빌려달랬다고 정말로 빌려줬으니 길을 빌린 나라 입장에서도 그 제3국을 쉽게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은 덤이다. 다른 예로 [[임진왜란]] 때 일본이 명나라를 친다는 구실로 조선에 길을 빌려달라 했을 때 조선 측에서 정말로 길을 빌려줬다면 이후 조선과 주변국의 관계가 어떻게 됐을지 생각해 보자.] 더 이상 원정을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한 마누일은 술탄과 평화 조약에 이르렀고, 십자군에 대비하기 위해 서둘러 수도로 복귀했다. 이후는 [[제2차 십자군 원정]]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